삶을 굴리는 일에 지친 사람들에게

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이 계절의 온도를 낮추고 있습니다.

이맘때가 되면 저는 고향마을을 자주 떠올립니다.

그곳에는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기억들이 많기 때문입니다.

그런데 기억의 한쪽엔 늘 외롭게 서 있는 한 사람도 있습니다.

그는 닫힌 대문 앞에서 꼼짝도 하지 않습니다.

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말이지요.

그는 첫눈이 내린 어느 날 다섯살 무렵의 제가 쌍둥이 동생과 함께 만든 첫 번째 눈사람입니다.

벌겋게 달아오른 고사리 손을 호호 불어가며 굴린 두 개의 눈 덩이, 돌맹이 눈과

나뭇가지 입을 달아주고서 우리는 그렇게 즐거울 수가 없었지요.

하지만 눈사람은 하루하루 짧은 겨울 햇살에 녹아 사라졌고, 그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

눈물을 흘리기도 하였습니다.

살아가는 일도 눈사람 하나 세우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.

모두들 자신을 처음 뭉쳐놓은 어머니와 아버지를 굴리며 살고 있지요.

그 깨끗한 눈 뭉치에는 자식을 향한 마음이 지문처럼 선명히 찍혀 있을 것입니다.

누구에게나 사랑 받는 사람이 되길 바라는 마음이,

그러나 이러한 부모님의 바람대로 살아가는 게 쉽지는 않지요.

때로 오물이 붙어 더렵혀지기도 하고 돌부리에 찍혀 깨지기도 하면서 눈물 흘릴때가 많습니다.

온전한 눈사람으로 설 수 있을까 막막해지는 날도 있지요.

그렇더라도 두 개의 눈 뭉치만 남아 있다면 포기해서는 안 되겠지요.

사람 하나를 세우고 끝내야 하는 게 우리의 삶이니까요.

올해도 깨끗한 눈이 내려서 새로운 눈밭을 펼쳐놓을 것입니다.

다 녹아버리기 전에 굴리다 만 눈덩이를 다시 잡아야겠습니다.

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  - 시인 길상호 -